to 친구

분류없음 2007/09/26 11:58

성호야. 잘 지내고 있니? 추석이라 간만에 본가에서 지내며 옛 서재 여기저기를 들추다, 먼지를 수북한 박스 속에서 보낸이가 '9분대 일병 한성호'로 적힌 편지를 하나 찾았다. 혼란스럽고 뭔가를 찾아 떠나야만 한 것 같은 맘은 여전한데, 너의 편지는 받은지 이미 13년이 지났고, 답장을 쓸 넌 세상에 없구나.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자기 넋두리만 실컨하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네가 야속했고, 그 버거움을 함께 나눠주지 못했던 내가 미안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선 네가 평온을 찾았으면 좋겠다. 또, 편지하마.

2007년 9월 26일
수지에서 황욱이가  























친구야, 안녕! 글로 인사하기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뭐하고 지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저번 휴가 때도 인사만 잠깐 나누고 말았구나. 무슨 생각하고 사냐? 내가 돌이켜 보니깐, 너와 같이 얽힌 추억이 적지 않더구나. 과답사 때 같이 춤추던 일 기억나니? 어깨동무하고 엉킨 다리로 쇼하던 거 말이야. 그 이후로도 가끔씩 그 춤추곤 했었지 아마. 지금도 하라면 못할 것도 없을 거야, 그치? 애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너희 집에서 둘이서 얼렁뚱땅 냉장고에 있던 고기들 다 꺼내다가 요리 만들고 CCR에 Footloose에, 옛날 노래들 틀어놓고 춤추고 놀던걸거야. 덕분에 우리 요리솜씨가 꽤 유명해졌었지? 사실은 네가 무대보로 대충 만든 거였지. 그래도 그 애플파이는 꽤 맛이 좋았지. 음, 참! 그때 내가 빌려간 ‘Dirty Dancing’ 비디오 기억나니? 저번 휴가 때 보니까 아직도 우리집에 있더라고. 그리고 혹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같이 빌려온 거 아니냐?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무래도 그렇지? 다음에 기회 있음 달라고 하렴, 돌려줄게. 그래도 이건 약과다. 백중이는 나한테 일학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빌려가 놓고, 그토록 닦달을 했는데도 아직도 안 내놓고 있단다. 기필코 받아내야지... 이거 뭐 꼭 밀린 외상장부 정리하는 것 같군. 그것들마다 시간과 함께 추억이 쌓여있을 거야. 다시 주고받으면 감회가 무척 새롭겠는데 그래. 아 맞아. 나래랑 나미랑 같이 네 차타고 스키장 갔던 것도 있구나. 베어스타운이었던가? 나래는 청바지 다 젖고, 나는 거의 굴러 다녔지. 오는 길에 춘천에 들려서 꽤 예쁘게 생긴 카페에 갔었지. 이름이 아마, 가만있자... ‘P&K Dreams'였던 것 같은데. 맞지? 춘천이 그렇게 놀기 좋은 곳인 줄도 그때 처음 알았었을 거다. 그 뒤로도 항상 그집 한번 다시 찾아가볼 마음이 있었는데, 시간이 없었는지 마음이 번잡했는지 한번도 못 가봤구나. 어쩌면 지금쯤 없어지고 다른 게 들어섰을지도 모르겠다.

이것들 말고, 너하고 나하고 갖고 있을 추억들 중에 가장 오래 갈게 무언지 알겠니? 모르겠지? 내 생각엔 네가 흑백으로 찍어준 우리 과대표 선본사진일 것 같다. 지금도 남순이 방에는 우리가 7동 위 나무 밑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확대된 것으로 걸려있더구나. 정작 사진을 찍어준 네가 나온 사진이 없어서 우스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사진들만큼 애착이 가는 사진도 없거든. 아마 사진이란 물건이 가진 마력이란 게 이런 건가보다 싶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중에서 가장 애쓰고, 고생하며 노력했던 기억들이 그런 애착들로 비춰지는 모양이야. 평생 그 사진들을 보물1호로 간직하면서 볼때마다 이 멋진 사진을 찍어준 너를 떠올려 보게 되겠지. 나도 무척 감상적인 사람이거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Time in a Bottle'이란 제목으로 또 네가 과사무실에 자보를 붙였던 적도 있었지. 지금 그 말이 다시 떠오르는 건 우연의 일치일까? 그 자보의 내용처럼 좋은 추억들을 많이 남기는 걸 네가 소중히 여겼던 탓이겠지. 너 스스로 얼마나 그게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같이 겪은 것들만으로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 시간들을 병속에 담아두고픈 마음은 정말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구나. 그래도 그때 91, 92년도엔 정말이지 멋모르고 실수와 잘못들을 남발하면서 다녔었다. 그땐 참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에 당황스러웠고. 난 무척 소심했고, 겁먹고, 경험도 부족한, 어린, 하지만 무턱대고 뛰어들기도 하고, 쉽게 극단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는, 그런 모자란 대학초년생이었지.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 그래도 바라던 대로 미련같은 거 안 남기고 대학을 이렇게 벗어나왔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단다. 처음부터 난 대학이란 곳에서 무언가를 기대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한번도 솔직한 나 자신을 드러내보였던 적도 없었거든. 그러기를 겁내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내가 없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얻어내고, 대학을 마치는 날을 기대했었지. 순간순간 나의 이런 틀을 벗어나고자 노력도 했었지만, 결국에 난 그걸 못 벗어난 것 같구나.

너 아직 병장 안됐냐? 됐지? 너도 금세 제대하고 다시 학교를 다니겠구나. 2년 남았지? 어떻게 보낼 계획이니? 난 아직도 까마득하지만, 96년 11월에나 제대를 하고, 97을 꼬박 학교를 다녀야 98년 2월에 졸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때가 되도 대학생이란 느낌으로 남은 일년을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아.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재석이는 곧 복학이다. 녀석은 다시 대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궁리하는 모양이더라. 너는 아마 복학해도 군대가기 전하고 별로 달라져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구나. 나는 이제야 육개월이 지났다. 일월부턴 일병이 되지. 그러고도 이년 가까이 남은 시간이 있단다. 그 시간들이 내겐 어떤 의미일지, 정지된 시간 속의 한 점으로 남고 말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복잡했던 스물두해의 인생이나마 잘 좀 정리해 볼 수만 있어도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워낙 혼돈에 시달리는 몸이라, 그렇게만 되면 정말이지 소원이 없을 것 같구나. 끝임 없이 나 스스로를, 그 판단들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라서... 잘 정리하고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 없이 살았갔으면 좋겠어.

너하고 다시 학교를 같이 다닐 날이 있나? 혹시 졸업 아니니? 잘하면 한 학기 정도는 같이 다닐지도 모르겠구나. 언제라도 서로 열심히만 살고 있다면 항상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음 휴가 받을 때쯤이면 민간인이 된 너를 보겠군 그래. 제대 가까울수록 몸조심하렴. 다음에 나가면 꼭 한번 술 한 잔 같이 하자꾸나. 이 카드가 잘 당도할지 모르겠다. 잘 받아보고 시간 나거든 답장하려무나. 그럼 오늘 이만 적으마. 건강하고 새해 복 많이 받아라.

1994년 12월 28일
부산에서 성호가


(좋아하는 친구 성호가 떠난지 3년, 여전히 핸드폰에 있는 녀석의 번호를 지우지 못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석의 흔적이 내 삶속에서 영원히 증발해버릴 것 같다.)

2007/09/26 11:58 2007/09/2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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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log 2007/09/27 16:26 PERMALINKMODIFY/DELETE REPLY



    고통의 진화 (by 한성호)

    생물체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클수록
    그의 생존가능성은 높아진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개체들일수록
    더욱 많이 살아남았고
    생물의 진화는 곧 고통의 진화였다

    남들처럼 산다는 게
    사람으로 주어진 운명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또 고통스러운지
    시간이 되기 전엔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었을까?




  2. 발기 2019/12/03 04:29 PERMALINK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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